학생들과 루터의 <선한 행위에 관하여>를 읽었다. 이 글은 개신교 윤리의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철학으로 말하면 칸트가 대표하는 근대 자유주의 윤리의 기원이 된다. <실천이성비판>과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도 있다. 칸트 책의 어느 부분은 루터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루터는 신앙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행위이고 최고의 행위요 최선의 행위라고 한다. 다른 모든 선은 신앙에서 나간다고 본다. 윤리의 종교적 기초를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루터에게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dachten) 하나님에게 모든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을 가리켜 신앙이라고 한다. 심판자의 이미지를 가졌던 중세 신 관념의 변화를 볼 수 있고, 신앙이 상당히 실존적 차원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폴 틸리히가 신앙을 정의하는 내용이 루터에게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루터는 말한다. 이것이 신앙이니, 사랑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또는 사랑의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마음의 움직임으로 보면, 신앙이 행위라고 보는 루터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내면에서 마음이 움직였으니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마음은 바깥으로 선행을 낳는다. 루터의 논리가 그렇다.
신앙은 확신과 신뢰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하나님을 기쁘게 할만한 행위가 바깥으로 나간다. 그렇게 신앙에서 나가는 선행은 즐겁게 그리고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선을 행하되 ‘즐겁고 자유롭게’ 선을 행하는 것은 칸트가 인간의 자기완성으로 보는 차원이다. 칸트는 그러한 도덕적 완성의 차원을 가리켜 거룩한 의지 또는 최상선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신앙이 있을 때에 거기서 선행이 즐겁고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면, 루터의 말대로 신앙이야말로 최고의 선한 행위라고 할만하다.
사실 칸트의 최상선은 모든 인문주의자들의 이상이고 삶의 목적이었다. 공자가 종심소욕불유구(마음이 가는대로 행하나 거치는 게 없더라)는 말도 칸트의 최고선(최상선이 낳는 행복)과 같은 차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하자면 성화의 단계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성인의 차원으로 생각했고 칸트는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말했다.
루터가 신앙을 최고의 선한 행위로 보았을 때에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악의 성향을 뿌리 뽑을 수 없는 죄인임을 잘 알았다.
다만 루터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에서 생기는 자유롭고 숭고한 도덕성을 구현하게 됨을 말하고자 했다. 즐겁게 선을 행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나가는 소박한 숭고함을 가리키고, 자유로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외부적 억압이나 도덕법의 규제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루터는 선의 교사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으면 뭘 해야할지 스스로 안다. 이것은 교회의 사제나 부모나 윗사람이 가르치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자율적 주체의 탄생을 가리킨다. 권위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요, 근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루터는 신앙을 주관적 확신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 습관으로 만든 중세교회를 비판한다. 사실 중세에는 윤리도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를 따라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을 중시했다. 덕의 윤리라고 한다.
루터와 칸트 계열의 윤리는 개인의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렇지만 루터의 주관주의가 가져오는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언지,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몰상식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주관적 확신이 이용될 수 있다. 칸트 윤리 역시 히틀러의 부하 아이히만의 발언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오늘날 중세적 덕의 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자유롭고 책임적 주체가 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일도 도덕성을 위해서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이 둘은 교육학적으로도 모두 필요하다.
사진은 루터가 사용하던 맥주잔(2018 촬영). 루터는 맥주를 매우 좋아했는데,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아내인 폰보라가 만든 맥주를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