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 때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은은한 햇살과 어우러진 시원한 대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조용히 서서 주변을 훤하게 비추는 단풍짙은 가을나무. 나무가 마시는 공기를 같이 마시며 그들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는다. 부지런한 아침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침 햇살에는 색깔이 있다는 것. 떠오르는 해의 붉은 빛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일까. 헷빛을 받은 풀 잎들이 붉은 색을 띤다. 만물을 살리는 투명한 붉은 빛이다. 아침에만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하얗게 칠한 낮은 담장 너머로 골목길을 내다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나이듦의 여유로움. 벌써 양지 바른 곳을 찾는 것일까. 집 모퉁이 좁은 의자에 앉아 조용조용 얘기하는 할머니 두분의 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걷다 보면 들국화의 색깔이 아침 다르고 오후 다른 게 눈에 보인다. 어느 집 담장 밑에 심어 놓은 흰 빛깔의 들국화. 무성하게 꽃을 피운 소박한 들국화가 꾸밈없이 아름답다. 체국(砌菊)이라고 했나. 우리 조상들이 앞마당 섬돌 옆에 심어 놓은 국화가 보인다. 천천히 걸을 때에 얻는 은총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가 보인다. 언제 심었을까? 붉은 철문 집 앞 마당에 두 그루 나무가 높이 솟아 있다. 지금은 아파트에 둘러 싸여 초라해 보이지만, 그 집이 누렸을 과거의 영화가 보인다. 언덕 위에 우뚝 세워져 한강을 내려다 보았을 품위있던 과거가 나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하나하나 펼쳐져 보인다. 한강이 보이고 들이 보이고 부는 바람이 보인다.
어둠이 내린 골목길. 땅을 보며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갑자기 두 개의 눈동자가 보인다. 고양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 보고 있다. 느릭게 움직이는 물체이기 때문일까. 전혀 적대감을 갖지 않고 저만치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밤하늘의 별이 보이고, 별 밑에서 마주친 그대와 내가 보인다.
사진: 시월의 마지막 날 산책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