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연무 곧 안개가 끼고 산책길은 신비롭다. 기온이 내려가며 겨울을 재촉하는 비. 그 중에서도 국화는 아름답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자태를 잃지 않고 고운 빛깔과 향기를 유지하는 담장 밑의 소담한 국화꽃. 국화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이번 가을 산책 중에 처음 갖게 되었다.
국화에 대한 찬양이 많았지만 사실 국화 좋은 줄 몰랐다. 온실에서 키운 화분 속의 국화가 꽃도 크고 탐스럽지만 그리 좋은 줄 몰랐다. 국화를 사군자로 삼은 조상들의 감탄도 그리 와 닿지 않았고 뭔가 나와 정서적으로 맞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올 가을 천천히 걸으며 어느 집 당장 밑에 심어 놓은 흰 소국을 보았을 때에 처음으로 아릅답다는 생각을 가졌다. 옛 문인들이 국화를 노래할 때, 바로 이 꽃을 두고 한 말이란 걸 알았다. 오늘날 많이 보이는 화분 속의 국화는 어쩌면 국화를 일본 왕실의 꽃으로 삼는 일본인들의 작품일지 모른다. 오늘 비내리고 바람부는 아침에 골목길 어느 집 담장 밑의 그 국화를 보러 나갔다.
퇴계 선생의 시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차가운 비 차가운 안개 온 산이 어둡고 冷雨寒烟暝一山 냉우한연명일산
동산 숲 쓸쓸한데 국화가 아롱졌네 園林蕭索菊花斑 원림소삭국화반
살아서 다만 꽃다운 향기 간직하고자 但知抵死芳香在 단지저사방향재
밤마다 부는 차가운 바람 서리 모른 체 하네 不管風霜夜夜寒 불관풍상야야한
조선중기 이최중(李最中, 1715~1784)의 시에는 섬돌의 국화를 반가워하는 시인의 담박한 교감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직 그만두고 고향집에 쓸쓸히 돌아오니 蕭然琴鶴罷官歸 소연금학파관귀
오직 섬돌 옆 국화 제자리 지키고 대나무는 싸리문 지키네 砌菊惟存竹護扉 체국유존죽호비
조선 왕족의 후예인 이최중은 능을 지키던 말단 벼슬을 병 때문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는 추위 내린 늦가을. 인적 없는 집 마당에 소국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주인을 반긴다. 가난한 조선 선비의 단출하고 청빈한 품성과 가을 국화가 어울려 한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체국은 섬돌 옆에 심은 국화를 가리키니, 오늘날 많이 보이는 꽃 큰 국화가 아니라 소국이다.
사진. 찬 비 내리는 늦가을 아침 산책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