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1523년에 <세속권세에 대하여, 세속권세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나>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정치신학을 세상에 알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자연법 사상 그리고 루터의 글은 서구 정치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고 보면 서양의 정치사상과 법사상은 복음과 법의 관계를 정립하면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법적 정의를 넘어서며 법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법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평화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완성된다. 그 점에서 복음은 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한다.
기독교 때문에 서양은 법 적용에 합리적 정의 이상의 사랑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점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문주의 정치철학은 전혀 새로운 주제에 부딪혔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며, 기독교 역사를 통해 다양한 길이 제시되었다.
루터의 해결은 무엇인가. <세속권세에 대하여>에서 루터 스스로 복음의 말씀이 국가의 실정법과 어떻게 양립되는지를 밝힌다. 복음서의 산상수훈과 사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와 송사하는 자를 길에서 만나거든 그와 화해하라…” “누가 너를 송사하여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리”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장)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로마서 12장)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베드로전서 3:9)
위의 귀절을 보면 국가법에 호소하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를 모욕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이라도 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화해하고 용서하라는 말로 들린다. 루터는 위의 말씀이 과연 그런 뜻인지 묻는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자의 행위를 법적 정의에 의해서 심판받게 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결국 법에 의존하는 것은 남을 위한 사랑의 행위에 가깝다. 나중에 <마태복음 주석>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도 자기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법에 호소할 수있다고 함으로써 소송의 의미에 대해 약간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루터가 변치 않고 강조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악인에 대한 복수심이나 증오심에서 고소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내면으로는 용서하고 사랑하나 외적으로는 세상이 질서와 평화를 잃지 않도록 불법한 자를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 결국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내면으로는 복음의 법(사랑의 법.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국가의 실정법을 따른다.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루터의 역설의 신학이 갖는 한가지 모습이다.
루터는 농민전쟁이 벌어진 당시에 폭도에 대한 공권력의 무력 진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진압하는 영주나 군인들이 계급적 증오심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한 죄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정당화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군중이나 법집행자가 죄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국가법이 악을 제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만큼 기독교는 악의 파괴력을 현실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법에 고소하는 것이 가능한가? 루터는 그 일이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일상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악인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말라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보여준다. 증오심을 가지고 법에 고소하는 것은 결국 법을 빌어 복수하는 것이고, 복수는 복수의 악순환을 낳으며 평화의 길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루터의 법신학은 악은 미워하되 악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과도 통한다. 루터는 불법을 행한 자의 육신은 법의 소관이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소관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그 영혼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범죄자나 악인의 영혼을 저주하고 증오할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 이러한 루터의 법신학은 결과적으로 악인이나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발전할 소지를 남겼으니, 칸트와 헤겔의 법철학에 루터의 신학이 반영된다. 그 결과 죄인의 인권이 발전하게 되었다.
사진: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 아래에는 청동문에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다. 윗 그림은 좌측에 루터가 성서를 들고 있고 우측에는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를 들고 있다. 가운데의 십자가는 중세의 ‘영광의 신학’에 대항하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상징한다. 뒷 배경은 비텐베르크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