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공부하면서 얼굴에 대해 강조하는 학자를 세 번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글을 통해서 만난 거다. 처음엔 본회퍼, 두번째는 레비나스 그리고 세번째로 르네 지라르이다. 본회퍼와 레바나스는 서로 상통하고 지라르의 얼굴 얘기는 전혀 다르다.
지라르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모방욕망으로 본다. 동물을 벗어나 인간이 되면서 (homminisation) 인간은 모방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모방욕망은 이웃이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타자의 욕망을 모방해서 인간은 타자의 소유를 부러워하고 타자를 라이벌로 만든다. 경쟁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소유의 모방은 폭력의 모방으로 바뀌는데, 서로 상대가 먼저 자극했다고 여기고 상대의 폭력을 모방함으로써 증오와 폭력은 악순환된다. 결국 사람의 행동의 근거는 자기에게 있지않고 남에게 있다. 인간은 남을 따라 산다. 그래서 차이가 없어지고 모두 똑같아 진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남을 따라한다는 말은 사람에겐 모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좋은 모델을 따라하면 좋은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좋은 모델이 되는 일은 드물다. 나쁜 걸 쉽게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상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나쁜 모델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은 모두 하나같이 남을 부러워하며 서로에게 폭력적이 된다.
악순환되는 상호폭력의 증거로 지라르는 인간이 싸울 때 얼굴을 보는 사실을 가리킨다. 동물은 얼굴을 보지 않는데, 사람은 얼굴을 보며 감정을 모방한다. 얼굴에 나타난 만족감을 따라 갖기 원하고, 얼굴에 나타난 상대의 분노와 폭력성이 그대로 내게 전염된다. 폭력의 모방은 쉬워서, 나는 한층 증가된 복수로 맞받아치게 되어 있다. 폭력의 악순환. 얼굴 때문에 상대방은 폭력의 모델이 되고 나는 그 모델을 따라 증오와 미움의 폭력성을 쌓고 분출한다.
본회퍼의 얼굴 얘기는 다르다. 본회퍼는 인간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상대의 눈을 봐야 얼굴을 보는 건데, 인간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모르는 사람과 눈을 어쩌다 마주치면 이내 얼굴을 돌린다. 눈을 보는 것은 서로 통하는 것이고 마음이 통하는 것이니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아무나 사랑하면 안 되고 아무나 눈이 맞으면 안 된다. 인간은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산다. 싸울 때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눈을 뚫을만큼의 공격성이지 눈을 보는 게 아니다. 빤히 쳐다보는 것도 눈을 보는 게 아니다.
본회퍼는 이처럼 인간이 눈을 마주보지 못하는 것을 수치심이라고 부르며, 관계단절의 신호로 본다. 눈을 보지 않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전혀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회퍼는 기독교윤리가 양심에 기초를 두면 안 되고 수치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심은 이미 타락해서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단절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회퍼는 기독교가 만인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는 셈이다. 본회퍼에게서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좀더 친밀한 관계회복에 나설 것을 요청한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은 만인 앞에 서는 것이다”고 했다.
본회퍼의 얼굴 얘기는 청년신학도였던 나에게 매우 인상깊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레비나스를 공부하면서 그의 주장이 본회퍼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레비나스의 얼굴 얘기는 철학도나 신학도들에게 유명해졌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의 얼굴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얼굴을 ‘본다’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서구언어에서 ‘본다’는 말은 ‘안다’ ‘파악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내가 알 수 없는 상대이며 다만 그의 부름에 응답해야할 상대이다. 알지 못하고 다만 응답한다는 점에서 레비나스 철학은 그리스 철학과 다르다. 레비나스는 앎에 기초를 둔 그리스 철학을 동일성의 폭력으로 본다. 타자를 나차럼 생각해서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타자는 그런 일반화의 대상이 아니고 다만 응답의 상대이다. 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레비나스에게서 제일철학은 윤리이다.
타자의 얼굴은 헐벗었다. 나는 헐벗은 타자의 얼굴에 나아가며 그의 부름에 답해야 한다. 응답(response)은 책임(responsibility)임을 의미한다. 나는 타자에 대해 무한책임을 진 유일한 자로서 특권을 지녔다. 이것은 상호성이 아닌 일방적 관계이다. 타자는 나에 대해 무한책임이 없고 다만 내가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 그 점에서 레비나스의 윤리는 상호성에 기반을 둔 근대적 정의개념과 다르다. 그리고 타자를 나처럼 생각해서 관용을 중시하는 근대의 개인주의적 덕목과도 다르다. 관용(generosity)은 일반화(generalization)의 결과이다.
윤리를 일반적 양심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회퍼와 레비나스는 닮았다. 레비나스는 내가 타자의 짐을 지는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상호성에 바탕을 둔 근대적 정의와 다르다.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사랑에 가까운 개념이다. 자기실현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와 다르다. 지라르 역시 상호성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인간의 선한 모델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십자가의 자기희생은 폭력의 모방을 거부함으로써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사랑의 선순환으로 바꾸었다. 지라르의 해법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는 데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자의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견해와 일치한다.
본회퍼나 지라르나 레비나스 모두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길을 일반윤리와 다른 기독교윤리에서 찾는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사랑의 윤리인데, 사랑의 윤리는 정의를 강조한 근대윤리와 다르다. 사랑의 윤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세상을 바꾸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은 자기를 바꾸는 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 역시 종교적 태도이다.
사진; 창 앞에 앉은 여인 (파블로 피카소, 1937). 2016년 촬영
얼굴이라는 주제로 나타난 유명한 세 분의 이야기가 재미 있습니다. 세 분의 핵심 주제를 종합적?으로 쉽게 줄거리를 잡아 주시니, 언제나 처럼 즐겁습니다.
-레비나스 이야기가 시작된 뒤 바로 첫 문단 3째줄에 ‘성호성’ 은 ‘상호성’으로 바로 잡아야할 둣 합니다.
수정 사항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