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존재론을 가져와서 기독교 신앙을 설명했다. 이른바 존재신학(onto-theology)이다. 그러면서 플라톤의 존재론은 기독교적으로 변형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정도를 말했는데, 신은 최고 존재요(summa essentia) 참으로 그리고 가장 존재한다(vere atque summe est). 모든 피조물은 가장 존재하는 신에게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신은 최고로 존재하면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점에서 최고선(summum bonum)이다.
이것은 삶과 존재를 매우 긍정하는 사유의 산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한 선하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인 하나님에게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좋은 일을 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 이미 좋은 것이요 선하다. 이처럼 존재긍정의 사유를 정립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넘어 삶을 축복으로 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립했다. 기독교는 삶을 축복으로 보고 죽음을 찬양하지 않는다.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란 책을 썼다. 환경의 위기를 맞아 인류가 존속해야 할 당위를 말하는 책이다. 피조물의 존재가 지속되는 것, 그것이 선이다. 칸트 철학은 동기가 순수하면 선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동기가 선해도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는 그 결과를 보고 악이라고 판단해야 한다고 한스 요나스는 주장한다. 그만큼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 지는 치밀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가 선이다. 인류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선이다. 존재를 이어가는 것이 선이다.” 이러한 사유는 기독교의 영향이다. 철학은 “왜 세상이 없지 않고 있는가”라고 오랫동안 물었지만 허무주의를 넘을 수 있는 답은 신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세상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고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이 있다. 하나님을 존재자체로 보는 관점은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도 존재론적으로 표현했다. 죽음은 무(nihilum)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죄의 산물이다. 죽음을 죄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동아시아의 관점이나 과학의 관점에서 낯설지만 그만큼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존재를 낳은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가 무가 되는 걸 원치 않으신다. 이런 생각은 장차 현대 신학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말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인간의 고통과 허무와 죽음은 하나님에게도 고통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정도를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요 가장 존재한다. 사람은 영원성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죽어 사라지는 존재요 따라서 하나님보다 덜 존재한다. 그리고 사물은 영원성의 관념이 없어 사람보다 덜 존재한다. 죄란 사람이 자기보다 존재의 정도가 더 높은 하나님보다 존재의 정도가 낮은 사물을 더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재물을 사랑하는 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나 사람을 재물의 수단으로 삼는 게 죄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정도가 떨어져 무에 가까워 진다.
죄란 존재의 정도를 삭감하는 행위 곧 자신의 존재를 플러스 쪽으로 이끌지 못하고 마이너스로 이끄는 인간의 욕망, 의지, 사랑이다. 존재의 결손(defectus)을 통해 덜 존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죄이다. 존재의 정도에 손해를 가함으로써 무가 증가한다. 그리하여 죄는 실존적으로 허무를 낳고 도덕적으로 악을 낳으며 존재적으로 죽음을 낳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은 인간의 죄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실존적인 허무와 불안, 그리고 무가 되는 죽음을 설명하는 데에 유리하다.
정리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신학은 존재와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리고 죄를 존재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존재감이 떨어져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허무와 죽음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무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성서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크게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다시 들고 나왔는데, 실존론적 존재론이다. 실존적인 한 기독교의 영향이지만 그가 말하는 기초존재론은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허무주의를 잉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무로 환원한다. 그의 기초존재론은 ‘나의 존재’에 집중했는데, 나보다 존재를 중시함으로써 근대의 주체철학을 배제하고 휴머니즘을 극복하려고 했다. 주체와 휴머니즘의 배제는 결국 기독교의 배제와 같이 간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무를 가리킨다. 그는 무(Nichtigkeit)에서 해방과 자유를 찾았다. 내가 없이 존재만 남은 무아에서 진리를 찾은 점에서 불교와 가깝다. 하이데거 자신도 불교선사와의 대화에서 그 점을 인정했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해방의 측면이 있지만 윤리가 밀리고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전체주의적 폭력을 정당화할 길을 열어 놓았다. 그가 나치즘에 협력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유대인인 레비나스가 집요하게 하이데거 철학을 공격하며 타자의 윤리를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를 연구한 사람이다. 기독교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도 하이데거의 무성(Nichtigkeit, Nothingness)의 측면이 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그것은 루터의 두 인격론(duplex persona)에서 잘 볼 수 있다.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 앞에서의 나’는 내가 부인된 나로서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자기'(Selbst, self)로 표현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의 자기는 나(Ich, I)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관심이 들어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자기는 ‘그것 자기'(es Selbst)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인격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하이데거가 불교를 알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내가 볼 때에 그는 루터의 한 측면을 극단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기독교의 자기 부인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나’라고 하는 책임적 주체를 끝내 놓지 않는다. 폴 리쾨르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를 놓지 않은 것은 개신교를 배경으로 한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코기토 철학의 영향이 아니다. 인식과 실천의 책임적 주체인 ‘나’는 이미 4세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주제였다.
십자가의 자기부인은 초윤리로 이어진다. 도덕적 양심보다 더 깊은 죄의식을 낳고 도덕적이고 법적인 정의보다 높은 사랑을 도덕적 주제로 삼는다. 아퀴나스가 말한대로 사랑은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신학적 덕목이요 초윤리이다. 초윤리는 윤리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윤리를 완성한다. 십자가의 자기부인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나의 책임적 주체성을 확대하고 강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랑의 윤리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며 타자와의 폭력의 악순환을 배려의 선순환으로 바꾸는 사회윤리적 측면을 지닌다. 사랑은 사회를 새롭게 하는 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초윤리(supra ethics)는 하이데거의 기초윤리와(Grund-ethik) 다르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낳는 기초윤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구체적 책임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하이데거가 무를 중심으로 사유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동사로서의 존재(Sein, being)는 구체적 삶을 벗어난 적멸의 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궁극적 단계로 보고 거기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나머지는 거기서 파생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최고 존재요 존재 자체로 본 것은 성서적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무로 표현될 수 없다. 그 점에서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카발라 전통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은 의미 있다. 그리고 내가 볼 때에 교토학파의 타나베 하지매가 신을 절대무로 표현한 것은 위험한 측면을 안고 있다. 그의 절대무 개념은 일본 불교에 바탕을 둔 것 같다. 내가 교토학파에서 느끼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너무 약화시켜 세상을 변화시킬 의지가 취약해지고 운명론이 득세하면서 결과적으로 잘못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도 일본철학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 점은 나중에 얘기하자.
사진: 교토 용안사의 정원. 2010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