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는 잠언과 이어지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전도서를 기록한 자를 전도자라고 하는데, 전도자란 깨달은 자라고 이해하면 된다.
잠언은 지혜가 줄 영광을 말하고 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와 명예와 생명을 얻는다(잠언 22: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원수와도 평화를 누린다.(잠언 16:7).
그러나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며, 지혜도 헛되고,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말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18) 이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아는 게 많을 수록 마음이 복잡해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갈 길을 잃고 생동감과 실천력이 약해짐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어른이 될수록 아는 게 많아지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이 알수록 단순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허허실실을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서양의 철학자 베르그송도 단순함(simplicity)을 중시했는데, 그가 말한 단순성은 아무 것도 몰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면서도 단순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 단순함으로 많은 걸 포용할 수 있다.
전도서는 지혜도 헛되다고 말하고, 그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행복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에게 주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2:26)
전도자가 모든 것을 헛되게 보는 이유는 누구나 결국 죽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지혜자도 어리석은 자처럼 오래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훗날에는 모두 잊혀지리라.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죽어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2:16) “인생은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노라. 바람이 불매 모두 사라지고 그 있던 자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노라.”(시편)
그러나 허무한 중에서도 전도자는 인생의 기쁨과 의미를 찾는다. 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이다. 13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11절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도달한 의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13절: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 이룬 것에서 만족감을 갖는 것. 이것은 일상의 일반적인 기쁨인데, 전도자는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맛있게 잘 먹고 일하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12절에 나온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없는 줄 알았다.” 13절이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 또는 자기성취와 관련된 것이라면 12절은 도덕적인 것 곧 남들에게 잘 하고 세상에 유익을 미치는 일이다.
도덕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차원은 종교이니 11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게 하셨느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아름답게 된다. 모든 것이 때가 있으니 때를 잘 맞추어 자기 자리를 지키면 아름답게 된다. 전도자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때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가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의미는 영원에서 나온다. 그 영원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뜻인 것 같다.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14) 얼마 전에 예수회 신부가 요즘 예배에 경외심이 없어졌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것은 단지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문제일 것이다.
경외심은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 위한 전제이니, 그래서 공자도 “신을 경외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고 햇던 것 같다. 신을 멀리하라는 것은 동양 인문주의의 아버지인 공자의 모습이고, 그러면서도 어떤 우주적 도에 대한 경외심을 지켜야 인간이 자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한대 이후 유학의 수양방법에는 성誠 외에도 경敬이 중시되었고, 주자와 퇴계는 누구보다도 경을 진리도달의 핵심으로 삼았다.
성서의 전도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도덕과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먹고 마시고 자기 일에서 만족함을 얻는 일상사가 충만해진다. 그래서 그런 일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이다.(2:13).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자기 뿐 아니라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대로로 갈 수 있다. 살면서 기쁘게 선을 행한다는 말(3:12)이 그 뜻이다. 자기와 모두를 유익하게 할 줄 아는 게 지혜이니,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지혜를 얻는 길이다. 그 점에서 전도서는 잠언과 연속성을 갖는다.
지혜가 많을 수록 근심도 많아진다는 것(1:18)도 지혜를 소유하려고 할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점언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3:7)고 말한다. 소유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지혜는 근심을 늘리지 않는다.
사진: 균스바하의 아침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