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의 원어는 Les misérables.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빅톨 위고의 대표작이다. 빅톨 위고의 작품이 프랑스에 준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 때문에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재건되었다니 소설의 힘이 놀랍다. 노트르담 성당은 프랑스대혁명 때에 파리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었다. 봉건 왕정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노트르담의 꼽추>로 사람들의 주목을 다시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몇 해 전에 화재가 났을 때에 제일 먼저 불타서 쓰러지는 장면이 세계에 중계된 중앙의 뾰죽탑도 혁명이 지난 후 19세기에 재건될 때에 세웠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라는 한 인물의 강인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인류에게 보편적 감동을 주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대변하는 작품으로서도 의미가 큰 것 같다.

미리엘 주교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작가 빅톨 위고가 생각한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이 미리엘 주교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진다. 소설에서 미리엘 주교는 귀족 신분이요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인데 프랑스 혁명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수도원에 들어 간다. 우연히 나폴레옹의 눈에 띄어 주교라고 하는 높은 직책에 오른다. 빅톨 위고는 그를 매우 청빈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꾸밈 없이 사람을 섬기는 소탈한 종교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의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신학자요 종교인으로서 나는 미리엘 주교라는 인물에 특별히 관심이 많이 갔다. 소설에 장발장이 등장하기 전에 G 노인과 미리엘 주교의 만남이 나온다. 빅톨 위고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40대 초에 그 대목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G 노인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 대혁명에 참가했었고 국민의회 의원이었다.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혁명을 주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이 시작되는 시기는 1815년이니 다시 정국이 뒤집어져 왕정이 복고된 시점. 민중은 그를 가리켜 왕을 죽인 폭도라고 비난했다.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 깊은 곳에 홀로 은거하며 쓸쓸히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미리엘 주교는 신부로서 종부성사를 베풀 의무를 느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은 왕당파이고 그 자는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혁명 주도 세력이 아닌가. 망설이던 신부는 내키지 않지만 신부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나귀를 타고 홀로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간 미리엘 주교는 마침내 집밖에 나와 의자에 앉은 채 석양을 바라보던 G 노인을 만난다. 그는 노인이 회개하고 종부성사를 받도록 대화에 나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나쁜 것입니다.” 신부의 말에 G 노인은 답한다.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진보를 이루는 데 어느 정도 폭력이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신부의 설득에도 G 노인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종부성사를 받지 않은 채 숨을 거둔다. 그가 마지막 숨을 쉬며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자유와 정의 만세, 프랑스 혁명 만세.”

미리엘 주교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신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주교. 주교가 장발장을 만나는 것은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이다.

미리엘 주교의 충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종부성사를 거부할 정도의 정치적 신념과 역사 의식. 그리고 폭력의 문제. 미리엘 주교는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을 싫어했던 것일까? 사람의 인식과 처신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주교로서 존중 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모든 폭력은 악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일까?

빅톨 위고는 신부와 노인의 만남을 통해 역사의 진보와 관련된 폭력의 문제를 제기했다. 초대 교회의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폭력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 가능한 일이며 도대체 의미가 있을까? 불과 몇 십 년 전에 인류는 세계 전쟁을 치렀다. 나치는 눈 먼 질투심과 차가운 증오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짐승 같은 집단 폭력을 가했다. 그런 현실 한 가운데에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의미를 지닐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악한 자에 대해서도 증오심을 갖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가르침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자기 학대적으로 만들지 않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려 애쓰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방어를 하지 못해 남들이 바보로 알고 스스로도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할만큼 하면 되는 것이고, 복수도 하고 살아야 건강해지는 것 아닐까. 더구나 구조적 억압에 대해 저항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거친 언사와 때로는 폭력도 수반되기 마련인데, 폭력을 악으로 보는 관점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니체가 기독교 윤리를 약자의 윤리라고 하고, 프로이트가 기독교 신앙에서 마조키즘 곧 자기 학대를 본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던 출옥수 장발장의 마음에 변화를 준 것은 용서와 사랑의 윤리였다. 미리엘 주교는 G 노인과 만난 후 더욱 깊어졌고, 더욱 폭넓은 인간애로 무장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작가가 장발장 등장 이전에 G 노인을 등장시킨 데에는 신부에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식은 그의 신앙심에 더욱 강인한 인간애를 불어 넣은 것 같다.

주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맞아주고 재워고 먹여 준 자신의 호의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간 장발장. 장발장의 품에 있는 은식기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그를 붙잡아 미리엘 주교를 찾았다. 그러나 주교는 말한다. “아, 내가 은촛대까지 가져가라고 했는데 왜 두고 갔는가?” 주교는 장발장의 절도와 배신행위를 법에게 넘기지 않았다. 죄인을 나라 법에 넘기지 않고 복음의 법에 따라 행했다. 그리하여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다. 장발장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주교가 장발장을 경찰에게 넘겼다면 정의는 실현되었을지 모르나 사람을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주교의 행위는 사실 상식 밖이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선한 사람을 배신하고 그의 소유를 훔치기까지 한 자신을 감싸주는 기적에 부딪힌 장발장의 영혼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의 증오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굶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어리 훔쳤다가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옥한 장발장.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던 그의 정신 세계는 미리엘 주교와 하루 만남으로 서서히 변화를 일으켰다. 불쌍한 소녀 코제트에 대한 그의 숭고한 헌신은 주교와의 만남에서 싹트고 있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 인간 장발장의 영혼이 파괴적이 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살리는 숭고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미리엘 주교의 용서라는 기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빅톨 위고는 한편으로 G 노인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은 위대하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 있다. 저항에 수반되는 폭력 때문에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저항의 가치를 평가절하 할 수 없다. 그렇게 작가는 프랑스 혁명을 위대한 정신적 업적으로 찬양한다. G 노인의 마지막 말은 곧 빅톨 위고 자신의 말이다.

반면에 작가는 또 다른 측면을 중시한다. 그는 미리엘 주교와 장발장의 만남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결국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용서와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종교적 행위이고, 종교가 세상을 살릴 것이다.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이 세상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빅톨 위고는 기독교를 그렇게 이해한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흐름을 거시적 차원에서 보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는 거대 담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까닭없이 당하는 것을 막고, 구조 악 속에서 희생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미시적 차원에서 내가 만나는 한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시적 차원이 거시적 차원으로 통한다. 사회 윤리와 개인 윤리는 늘 같이 가야 한다.

사진: 장발장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미리엘 주교 (소설 레미제라블의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