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타락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부패와 타락이 있기 마련이고 종교라고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종교가 더 심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속에서도 자기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 뿐.

종교의 존재 이유는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종교는 세상 한 가운데에 있는 세상 밖이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둠으로써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 많은 돈과 권력이 아니더라도 자유롭고 떳떳한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알리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그 역할을 잘 하면 선한 권위로 세상 권력을 지도하고 견제할 수 있으며, 그런 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의 본분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에 모이는 돈과 권력을 보고 모여드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신의 이름을 빌어 자기의 탐욕을 채운다.

중세 교회만 해도 그렇다. 정치 권력의 수장이 교회의 권위에 순종했던 중세 체제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세속 권력이 초월적 진리의 힘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교회라고 하는 제도를 통해 현실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서양의 중세 체제이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주어진 권위를 인간 소유의 권력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교회 내에 들끓고 교회는 부패했으니 마침내 15세기부터 100년 동안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에서 불교가 큰 힘을 갖게 된 것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부터라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마을마다 절을 두어 출생 신고와 사망 신고를 받도록 했다. 말하자면 인구를 파악하고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데에 사찰을 이용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태어나고 죽을 때에 절을 거친다고 하는데, 그런 풍습은 도쿠가와 시대 곧 에도 막부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절은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점차 부자가 되었고 권력 기관이 되어갔다.

그러자 자격없는 승려들이 자리를 꿰차기 위해 모여들고, 각종 부정부패가 사찰을 채우기 시작했다. 절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들을 착취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고 권력과 재물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된지 불과 몇 십년 후인 1660년 대에 이미 사찰을 정화하려는 번주의 노력이 있었다.

사찰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커 갔고 마침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불교 탄압이 벌어진다. 명치유신은 조직적으로 사찰을 훼손했는데, 그것은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고유 종교인 신도를 살리고 외래 종교인 불교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찰의 부패에 대한 영주들의 불만과 국민들의 반감이 팽배해 있었다. 명치유신 당시 불교 사찰의 50%가 사라졌고 문화재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도 비슷했던 것 같다.

고려 시대에 불교는 일종의 국교였으며 사찰은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토지와 노비와 재물이 많은 사찰에 제공되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니 부패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불교의 개혁을 위해 일어난 분이 보조 국사 지눌 (1158~1210)이었다. 송광사에 그 분의 유품이 있고 부도가 있다.

지눌이 승과에 합격하던 해에 당시 서울이던 개경에서 담선 법회가 열렸다. 전국의 큰 스님들이 모여서 불가의 도를 논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그 모임이 진리를 나누기보다 높은 자리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임을 알았다. 크게 실망한 지눌은 출가의 본 뜻을 이루기 위해 개경을 떠나 구도에 정진한다. 세 번 크게 깨닫고 정혜쌍수의 가르침을 펴며 한국 불교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에서 지눌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한다.

지눌이 제자들과 일종의 불교개혁을 위한 결의를 다진 곳이 영천에 있는 거조사이다. 권수정혜결사문을 새긴 비석이 남아 있다.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위해 정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운동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다. 그 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땅에서 넘어졌으면 땅을 짚고 일어나라.” 여기서 땅은 마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세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세상이 타락해서 시험에 들어 체념하거나 핑계를 대지 말고 세상을 딛고 다시 일어나 진리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이다. (내가 알기로 이 구절은 본래 화엄경에 나오는 글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사람이 넘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켜야 하는 법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정진 이후 수 백 년이 지난 다음에 이 땅에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믿으며 무 보다는 존재를 선으로 보고 삶을 축복으로 보는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 서구의 물질 문명과 함께 들어 온 개신교는 급속히 성장했는데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교회가 부패했다는 말이 많았다.

그 이후로도 100년 가까이 특별한 정신적 개혁 없이 지내왔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니 회개하여 고칠 생각이 없다. 자리를 탐하여 거래하고 돈과 권세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종교 지도자 행세를 한다. 강단에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기 좋은 대로 성서를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마구 떠들어 댄다. 혹세무민이 따로 없다.

BC 7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쳤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사진: 리장의 옥룡설산과 호수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