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가진 게 많은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영토가 큰 나라는 그걸 지키려고 더 영토를 넓히는 제국주의에 빠진다. 그 탐욕이 불러오는 인간의 불행과 무고한 자들의 희생.
딸 하나를 둔 우크라이나의 젊은 아버지가 예비역으로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면서 결연하게 말한다. “우리 후손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해야합니다. 우리 딸이 아버지를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러시아의 막강한 전력에 대항해 이길 승산이 없지만 죽기까지 싸우려는 용기가 장하면서도 슬프다. 왜 이런 비극은 지속되는가.
BC 7세기 말. 이스라엘의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 등장한 예언자가 예레미야이다. 그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해서 많은 이들의 미움을 샀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유다 나라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방도를 제시한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예레미야 7:5-7)
첫째는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한다’는 구절은 ‘서로를 정의롭게 대하라’고 읽을 수도 있다. 뇌물을 받지 않고, 재판을 왜곡하지 않고,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고, 고리대금이나 불법으로 재산을 쌓지 않는 일 등이 포함된다. 또한 약자와 소수자를 억압하지 않는 일이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고대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취약 계층이었다.
둘째는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면 안 된다. 인간 사회는 죄 없는 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다같이 그를 공격하면서 사회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결속을 다진다. 성서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희생양 만들기를 금한다.
셋째는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이다. 선택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끊임없이 자연 종교로 돌아가 우상을 섬기고 미신에 빠졌다. 우상은 자기 욕심이 만든 신이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는 승리의 신이요 전쟁의 신이다. 성서는 그런 신을 믿는 것을 미신으로 본다.
첫째는 나라의 도덕성을 세우는 문제로서, 의식적 행동을 정화하는 일이다.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불의한 행동을 멈추는 일이다.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모든 일을 정의롭게 처리하는 일.
둘째는 인간사회의 무의식을 정화하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모르고 이익 집단으로 갈라져 있다. 이익 집단 속의 군중이 된 인간은 무고한 희생양을 잡는 일에는 일치해서 결속된다. 모두 희생양의 피를 보면서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찾는다. 피가 평화를 만든다. 갈등이 심화되면 그만큼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성서는 희생양을 통해 평화를 만드는 방식을 거부한다.
쳇째 둘째는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세째는 종교와 신앙을 정화하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우상숭배를 구분할 줄 아는 자기 성찰이 늘 필요하다. 대개 인간이 믿는 신은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고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는 정복의 신이며, 성서는 그런 신을 믿는 것을 미신이요 우상숭배라고 규정한다.
우상은 사람이 자기 욕망을 위해 만들어낸 신이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자기 성찰을 방해하고 결국 인류의 무의식을 정화하지 못하여 희생양 만들기를 밥먹듯이 한다. 그리고 의식적 행동도 정화하지 못해서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처사와 억압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의를 세우지 못하니 도덕성을 추락시켜 결국 개인과 사회에 해를 끼친다.
세번째 요구와 앞의 두 가지 요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해 예의를 지키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 때에 인간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가늠하는 시험대이다.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킬 줄 알 때에 한 개인이나 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와 신앙을 정화하라고 예레미야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인간사회의 무의식적 폭력과 의식적 폭력을 정화하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우상숭배를 금하고 바른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결국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선택의 길이 인간과 인류 앞에 놓여있다. 구약성서의 일관된 논조가 그렇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무의식적 폭력과 의식적 폭력을 고발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 일이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방도이기 때문이다.
국가 멸망의 위기 앞에서 성서는 외교적 방책이나 군사력 강화를 말하지 않는다. 중동과 이집트까지 정복한 바빌로니아의 군대 앞에서 외교나 군사력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도덕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세상을 만든 하나님의 꿈을 실현해 드리는 일에 마지막으로 걸어볼 희망이 있다. 서로 서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만이 마지막 남은 길이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행한 방책은 노예 해방이었다. 예레미야의 신탁을 따라 바른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예 해방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시드기야를 끝으로 다윗 왕조는 망하고 BC 582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유다인들은 바빌론으로 추방되어 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는 채권자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 온 가족이 같이 옮겨와 종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성서의 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어도 동족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했다. 채무로 인해 채권자의 집에서 노동으로 빚을 갚기로 한 경우에도 종 취급을 하지 말고 집에 거하는 품꾼으로 여겨야 하고, 6년이 지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레위기 25장). 노예를 해방하는 7년 째를 가리켜 희년이라고 한다.
다른 신이 아닌 성서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독특성은 그처럼 사람을 대하는 자세의 독특성 곧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노예해방의 희년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노예가 생산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시대에, 빚도 다 안 갚은 사람을 놓아 주고 빚을 탕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주변의 모든 민족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위기에 몰린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데서 나라 구할 길을 찾으려 했다. 그는 유력 인사들을 모아 놓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동족을노예로 부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노예를 풀어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본전 생각 때문에 곧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종살이하던 사람들을 다시 끌고 와 종으로 일하게 했다. 성서는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분노했으며 결국 유다는 멸망의 길로 갔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34장).
사람이 사람을 종으로 부리고, 재물에 혈안이 되어 선한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린다. 이런 일을 막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살 길이고, 인류라는 종이 멸망하지 않고 살 길이다. 그것이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여전히 힘이 지배하고, 인간은 여전히 무고한 자의 피를 봐야 삶을 유지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도 그렇고 국제사회는 더욱 그렇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Miserere nobis, Deus !)
사진: 영아 살해 (지오토, 14세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인간의 끝없는 죄에 마주합니다
2022년을 살아가는 이곳에 아직도 전쟁의 공포라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을까요?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눈을 떠서 알게하소서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