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크라이나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다. 피난 길을 떠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눈물에는 헤어진 아빠와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슬픔이 담겨 있다. 살아남은 노인들은 삶의 역사가 담긴 거리와 건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훔친다.

푸틴의 침략 전쟁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세력이 교회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신의 이름으로 푸틴의 전쟁을 축복한다. 또한 교인들을 움직여 국민의 이름으로 푸틴의 전쟁을 지지한다.

2. 그리스도교는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로 갈라졌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신학적 차이와 지리적 문화적 차이가 큰 역할을 했다. 로마 가톨릭을 서방교회라고 부르고 그리스 정교를 동방교회라고 부른다. 동방 정교(그리스 정교)의 총본부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있는 소피아 성당이었다. 동방 정교는 그리스와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다.

그런데 동방 정교의 교회 이름은 각 나라의 이름을 따라서 부른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종교는 동방정교에 속하는 러시아 정교이다. 오늘날 국교는 없지만 러시아 국민 70 %가 러시아 정교의 신자라고 한다. 푸틴 역시 교회의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여 자신이 러시아 정교의 신자임을 과시한다. 그는 러시아 정교를 빼고 러시아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러시아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교회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애국심을 불어넣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고 러시아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푸틴은 교회를 지원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소비에트 시절에 파괴되었던 수많은 교회가 재건되었고 모스크바에 새로운 교회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러시아 교회의 총대주교인 키릴과 푸틴의 관계도 매우 돈독하다. 러시아의 고위직 사제는 말한다. “푸틴은 신이 내리신 지도자입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에 대해서 러시아인들의 대다수는 푸틴을 지지한다. 푸틴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전쟁 반대의 목소리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은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운다. 그리고 국가와 교회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의 대다수가 정교회 신자라는 사실은 푸틴의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해 준다. 사실 푸틴이 수많은 교회를 지은 것도 대다수가 교회 신자인 러시아 국민의 환심을 사고 그들의 애국심을 통해 자기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3. CNN이나 BBC, 알자지라, DW 같은 방송을 통해 살상의 현장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데에도 푸틴이 태연하게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까닭, 그것은 국민여론이 언제나 자기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푸틴의 믿음은 든든한 교회의 지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은 서방 언론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국내 언론도 국가의 통제 하에 있는 국영방송만 남겨 두었다. 유일하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방송사인 Echo of Moscow 도 방송금지되었고, TV Rain 같은 독립언론은 탄압을 피해 이스탄불로 피신했다. 최근에 러시아 국회에서 반국가적 언론행위에 대해서 최대 15년까지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반대 시위는 금지되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은 감금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도 교회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마치 정치를 떠나 순수하게 영적인 일에 주력하는듯 보이지만, 사실은 통치자에 대한 절대 충성이 러시아 교회의 행동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침묵은 정치를 떠난 게 아니라 정치와 완전히 혼연일치된 정치적 행위이다.

4. 사실 교회와 국가가 밀착되어 있는 것은 동방정교의 오랜 전통이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의해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동방교회의 최고수장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소피아 성당을 지은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런 전통을 확고하게 만든 사람이다.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 됨으로써 교회는 국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통치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한다.

5. 동방교회와 달리 서방교회는 국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통치자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방교회는 통치자의 권력을 견제하는 전통을 지녔다.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아들들이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고 교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가이사랴의 주교인 유세비우스는 로마제국을 메시아 왕국으로 보려고 했다. 이른바 제국신학이다. 가이사랴는 성서에도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도시로서 동방교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유세비우스와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제국신학을 거절했다. 권력과 법으로 다스려지는 국가는 결코 하나님 나라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공동체인 국가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서양의 정치철학에 큰 영향을 준 그의 신학사상에 따르면 인간이 죄로 타락하자 하나님이 할 수 없이 허락하신 것이 국가이다. 정치와 국가는 공권력으로 악을 제압하는 나름의 역할을 하고 현실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공자나 맹자 그리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서방교회의 신학에서 국가는 최고선의 공동체가 아니며, 국가는 개인의 목적일 수 없다. 지배와 통치질서가 없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이고, 그걸 이 땅에서 보여주는 상징적 공동체가 교회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따라 서구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체적 사랑을 위해서 교회가 국가를 감시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 땅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는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통치자의 잘못에 대해 훈계한다. 왕이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사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영적인 행위인 고백성사는 그런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이런 국가관과 정치 철학으로 말미암아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서는 중세 체제가 생겨났던 것이다.

6. 하나님 때문에 국가보다 사람을 중요시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서구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정치 사상의 기초를 형성했다. 사실 근대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기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요, 더 올라가면 구약성서(사사기, 사무엘 상, 예언서 등)와 신약성서(복음서와 바울서신)에 있는 것이다. 홉스와 로크 그리고 칸트와 헤겔은 모두 서구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근대 자유주의 사상을 펼친 사상가들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 오렌지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시민 혁명이 있었다. 친 러시아를 지향하는 정권에 반대하고 부패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그때 시민 운동의 지도자가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서구유럽이 중시하는 가치는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가치가 존중 받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정확하게 보았다. 우크라이나의 젊은 대통령 젤렌스키가 친 서방 정책을 편 것은 국민들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근대적 가치의 뿌리가 서구 그리스도교에 있다는 사실은 이제 잊혀졌다. 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세상에 퍼져서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일상적 가치가 된 것이다. 원래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추구한 세속화라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세상에서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확장시키고 사회에서 그런 가치가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일이다. 만일 그 가치를 훼손하는 세력이 있다면 꾸짖고 막아야 한다.

불행하게도 러시아 정교회는 국가와 너무 밀착되어 있고 통치자에게 충성하느라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런 교회는 러시아라는 세상 나라에 이바지할 지 모르나 하나님 나라에는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말했다. 공산주의가 그리스도교 문명권 중에서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만 성공한 이유는 교회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방정교의 교회가 사람을 억압하는 부패한 통치자를 꾸짖지 못하고 오히려 충성만하다가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공산주의가 출현하자 민심이 급격히 그리로 쏠렸다는 얘기이다. 지금 러시아 교회는 화려한 교회 건물이 올라가는 외관에 취해서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7. 물론 서방 국가들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방의 한 기자가 러시아의 외무장관 라호프에게 물었다. “당신의 폭탄으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밤에 잠이 옵니까?” 그러자 라호프는 이렇게 답했다. “왜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행한 폭력은 말하지 않습니까?” 사실 미국은 친미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 정부를 도왔고 독재자 밑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미국은 소련에 가까운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가지 파괴 공작을 폈다.

푸틴이 내세운 이번 전쟁의 구실도 나토의 세력 확대이다. 서방의 공동안보기구인 나토가 동쪽으로 계속 세력을 넓히고 있는 마당에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담하면 러시아의 안보가 직접 위협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라호프와 푸틴의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토에 가입한 측면이 크다. 학자들 사이에는 우크라이나를 중립국으로 만들어 러시아의 위기감을 없애야 전쟁이 끝날 거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대안이 제시되겠지만. 주권국가를 침공한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구나 주거지와 병원을 계속 무차별 폭격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게 만드는 일은 분명히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세계 언론사의 현장 취재가 방송으로 나가는데도 러시아의 고위장성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스스로 자기 시민을 폭격하는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8. 중요한 것은 결국 민주주의 (democracy)와 전제 정치(autocracy) 사이의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떤 정치체제도 완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서방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비판의 자유가 있다. 언론 기관이 정부를 비판하고 국민이 감시하기 때문에 절대 권력의 횡포가 자리 잡기 어렵다.

미국 MIT 대학의 노암 촘스키 교수는 수 십 년 전부터 미국을 불량 국가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 내에서 신분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존경 받는다.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의 길을 열어 놓는 일이야말로 유한한 인간이 망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전제 정치 체제는 견제가 없는 독재자의 독자적 결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고, 자유와 인간성을 말살하여 결국 폭력과 멸망의 길로 안내한다.

이번에 전쟁을 결정한 크레믈린 내의 권력자들의 아들 딸은 대부분 서유럽에서 산다고 한다. 푸틴의 자식들은 독일과 네덜란드에 산다고 한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스위스에 피신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들도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살기 좋은 곳임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9.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정치 권력을 감시한 결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낳았다. 반면에 러시아 정교는 국가주의에 기울어서 전제 권력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

사순절 기간이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청년들의 눈물과 그들을 잊지 못하는 산 자들의 눈물을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은 바로 그들의 고통이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다. “우리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이고, 그리스도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다.”

사진: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교회. 스탈린이 파괴한 교회를 소련 붕괴 후에 모스크바 시장이 막대한 돈을 들여 재건했다. 러시아 정치지도자들은 교회를 통해 러시아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