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자로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평화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성서의 중심 주제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평화에서 시작해서 평화로 끝난다. 누가복음에는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에 하늘에서 들린 천군천사의 장엄한 노래를 전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평화로다.” 그리스도의 탄생 메씨지는 이 땅의 평화이다. 한편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 땅에서 하신 첫 마디 역시 평화였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Pax vobis) 예수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다르다. 로마의 평화는 자연사에 속하고 예수의 평화는 자연사를 극복한 정신사에 속한다. 로마의 평화는 물리적 힘에 의한 평화이고 예수의 평화는 영적인 힘에 의한 평화이다.
  2. 인간은 두 세계를 산다. 힘에 의해 질서를 만드는 자연의 세계 그리고 영성에 의해 평화를 만드는 자유의 세계. 도덕성은 자연과 자유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인간세상이 자연사의 일부인 한, 국가의 존재는 개인을 위해서도 중요하고 로마의 평화는 여전히 평화 정착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개인이나 국가에게는 물리적 힘이 필요하다. 가진 게 없는 개인은 무시당하고 약소국은 침략당한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하다.
  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인간 역사는 자연사를 벗어나 정신사로 나아가야 한다면, 평화를 만드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힘이 아닌 말로 갈등을 해결하고, 증오심 없는 정의로 질서를 잡고, 물질과 영토에 대한 무한 욕심을 포기할 줄 알고,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한 책임을 느낄 줄 아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 한 인간에 대한 충성심이 확립되어야 한다. 애국심을 넘어 국적과 관계없이 한 인간 자체의 존엄성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것이 로마의 평화(Pax Romana) 를 넘어서기 위해 선포된 그리스도의 평화 (Pax Vobis)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인간 역사의 의미이고, 신학적으로 볼 때에 시간은 그 일을 하라고 존재한다.
  4.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평화는 압도적 힘을 가진 하나의 나라가 존재할 때에 가능해진다.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는 전쟁 억제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지만, 아직 인류는 힘에 의한 평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 제국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길게 기억되는 것은 지중해 연안을 제패한 압도적 힘으로 오랫동안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팍스 로마나’는 상당 기간 지속되며 다양한 문화를 꿏 피웠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어디를 가도 로마의 원형 극장이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로마가 주도한 평화가 안정된 질서를 만들었다는 증거이다. 로마의 유산 중에서 법이 가장 빛나는데, 그것은 힘에 의한 통치질서를 이민족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국제질서 뿐 아니라 한 국가 안에서도 힘에 의한 평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에도 막부가 일본내전을 평정한 막강한 중심권력으로 군림하면서 오랫동안 평화를 구가했다. 힘의 평화가 이룬 정치적 안정이 3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다.

현대사에서 세계 2차대전 이후 80년간 세계 대전 없이 나름대로 평화를 누린 것은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압도적으로 최고의 힘을 가진 미국에 도전할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세계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5. 물론 한국 전쟁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 대에는 이라크 전쟁도 있었고 아프카니스탄 전쟁도 있었다. 이런 전쟁들은 패권 다툼의 부속물인 희생양의 성격이 크다. 대등한 힘을 가진 두 나라가 존재하면 불안한 평화가 유지된다. 패권국가들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가 상존한다. 힘이 비등하면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항상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압박감은 일종의 두려움인데 두려움은 공격성으로 변하고, 공격성은 상호 모방되어 점차 증가된다. 이차대전 후에 이른바 냉전체제가 그랬다. 미국과 소련은 지구상의 강대국으로 라이벌이 되어 서로를 견제했다. 한국 전쟁도 두 패권 국가의 힘이 충돌한 곳에서 벌어졌다.

국제질서는 상당한 부분이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힘에 의한 평화는 언제나 희생양을 요구한다. 압도적 하나의 힘이든 아니면 두 패권 국가의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든, 힘에 의한 평화는 항상 희생양을 요구한다. 누가 대신 피를 흘리는 조건으로 패권국가들 사이의 직접적 충돌과 전쟁이 억제된다. 지역 분쟁으로 말미암아 세계 대전이 억제되고 큰 규모에서 나름대로 평화가 지속된다. 지역 분쟁은 대개 그 지역이나 나라의 내적 요인이 불씨를 만들지만 국제질서의 요인에 의해 확대된다.

무기산업은 이른바 힘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어느 나라든 기본적으로 방어를 위해 무장한다. 전략적 핵무기라는 것은 핵무기를 전쟁을 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의 도발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공포가 반영된 평화이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라인홀드 니버가 신학자이면서도 힘의 균형을 통한 정의와 평화를 외친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패권국가가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한 이론이다.

그러나 경제력과 사회생활의 유연성에서 소련은 미국과 서방에 미치지 못했고 마침내 1990년에 소련이 붕괴했다. 그 이후 30년동안 미국은 명실상부한 유일의 패권국가로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정신적으로는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내세우고 물질로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팍스 아케리카나를 주도했다. 그리고 질서유지 곧 평화를 위해 미국은 곳곳에서 직접 간접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강대국이 되면 폭력적 힘의 행사를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유일한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한 체제로 급속히 경제력을 키우고 미국과 함께 세계의 2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렇게 되면서 국제질서와 평화는 미중 관계의 긴장 완화와 전쟁 억제에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두 나라는 이미 서로를 견제하고 힘 겨루기를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기까지는 조심하겠지만 호시탐탐 세계를 제패하기 위한 기회를 보고 있으며 , 곳곳에서 지역 분쟁에 개입하여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추진하는 신실크로드 개척은 세계 전역을 파고들어가 자리잡고, 중국이 초강대국임을 세계에 과시하는 목적이 있다.

6. 중국 뿐 아니라 러시아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이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 맞서 지역 분쟁에 개입한 나라는 러시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패권국가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과정에 발발한 것 같다. 현실적으로 나토 동진으로 인한 안보 위협을 느낄 수도 있지만, 원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를 매우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나토 가입을 원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에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점령한 다음부터이다. 그때부터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계의 분리주의자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사실상 푸틴은 19세기의 러시아 제국과 20세기의 구 소련의 위상을 되찾고 싶어한다. 러시아는 이미 2008년에 구 소련의 일원이었던 조지아를 침공했다. 구실은 탄압받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같은 구실을 내세웠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던 날 그의 연설을 보면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존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푸틴은 집권 이후 꾸준히 서방과 교류하면서 러시아의 경제력을 키웠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지금 무너진 패권국가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을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을 러시아와 미국의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결국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패권다툼의 도식을 적용한 것이다.

7. 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자존심을 되찾는데에는 애국심이 큰 역할을 한다. 한 인간이 자존감을 갖는 데에는 자기 나라의 위상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러시아인들의 상당수는 구 소련을 그리워한다. 초강대국의 위상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천 만 명을 학살한 스탈린을 숭배하는 행사도 열린다. 소련의 붕괴 후 약화되었던 러시아의 힘을 어느 정도 끌어 올린 푸틴에 대한 지지도 거의 숭배에 가까운 것 같다. 노인 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그렇다. 애국심이 큰 역할을 한다. 푸틴은 이번 전쟁이 미국과의 전쟁이라고 선전함으로써 시민들의 적대감과 애국심을 끌어 올린다.

물론 약소국의 애국심은 정당하고 숭고해 보이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의 어떤 모녀가 자원해서 총을 들고 전장에 투입되었다. 엄마는 패션 디자이너이고 딸은 의대생이다. 딸이 걱정이 되지만 엄마는 딸의 결정을 존중한단다. 총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 외침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죽음을 무릅쓰는 걸 보면 숭고해 보인다. 조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심이나 방어적 민족주의는 자연사를 벗어나지 못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그 존엄성을 지키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다. 사실 러시아도 2차 대전 때에 나치를 물리친 애국심은 자랑거리로 삼을만 하다. 5월 9일이 바로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 기념일이다.

그러나 한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애국심은 얼마나 큰 폭력인가. 지금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전쟁이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말을 인터뷰에서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매우 무지하고 폭력적으로 보인다. 마치 티베트와 위구르 자치지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중국정부를 지지하는 중국청년들의 맹목적인 애국심을 보는듯하다.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애국심에 의해 인간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극대화한다.

사진: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위의 전차. 제국주의는 힘의 상징인 독수리나 사자를 문장으로 삼았다(2007년 촬영)